유다의 참된 축복
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어떻게 유다를 희생적 사랑으로 이끄셨는가
창세기에 기록된 유다의 이야기는 제가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반전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.
어머님들께서는 “우리 아이가 요셉과 같이 되게 해 주세요”란 기도를 하는 경우는 종종 듣게 되는데, “우리 아이가 유다와 같이 되게 해 주세요”란 기도는 듣게 되지 않습니다.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…
왜 유다는 그토록 풍성한 복을 받았을까?
저는 어릴 때부터 요셉 이야기를 참 좋아했습니다.
그런데 열두 지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하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. 구약에서 ’요셉 지파’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. 야곱은 요셉에게 두 몫의 유산을 주었고,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지파를 이루었습니다. 그러니 요셉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. 다만 열두 지파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, 정작 중심에 서 있는 지파는 유다입니다.
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유다에게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선포합니다.
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(창세기 49:10)
이 예언은 다윗이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면서 이루어졌고,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지파에서 오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1. 그런데 잠깐만요. 유다는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넘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던가요?
그렇습니다. 그런데 성경에는 유다에 관한 아주 풍성한 이야기가 있고, 우리는 그것을 자주 지나치곤 합니다.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.
순탄치 않았던 시작
먼저 유다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. 유다는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.
아버지 야곱은 성경의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, 젊은 시절에는 자기 꾀와 힘에 기대어 살았습니다.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고,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2. 장인 라반 밑에서 재산을 불릴 때도 계략을 썼는데, 라반 역시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. 잠언의 이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.
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(잠언 3:5)
어머니 레아와 라헬은 둘 다 야곱의 아내였고, 서로 질투하며 자주 다투었습니다.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으니 레아가 특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.
형들도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. 장남 르우벤은 미덥지 못했고, 동생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 빌하와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3.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. 누이 디나가 세겜에서 성폭행을 당했을 때, 그들은 그 성읍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4.
정리하면, 유다는 계략을 꾸미는 아버지와 정직하지 못한 외할아버지, 질투하는 어머니, 그리고 부모의 가장 나쁜 모습을 닮은 형들 사이에서 자랐습니다. 유다 자신도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. 잘 알려진 대로,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넘기고 아버지께 거짓말을 한 장본인이 바로 유다였습니다.
유다의 고난
그런데 유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. 창세기는 요셉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, 유다의 두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루는 38장으로 넘어갑니다. 요셉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뜬금없는 막간처럼 보이지만, 저는 이 장이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. 다만 읽기 쉬운 장은 아닙니다.
여기서 이야기를 다시 풀어 쓰지는 않겠습니다. 다만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었고,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만 짚고 가겠습니다. 이 일이 있은 뒤 유다는 다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.
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(창세기 38:26)
유다가 자기 잘못을 입으로 인정하는 장면입니다. 그리고 그는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가 되었습니다.
저의 아버지도 아들을 잃으셨습니다. 그 일이 있은 뒤의 일을 저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. 다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.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위로하려 했지만 아무도 그러지 못했는데, 하루는 아버지의 직장 동료 한 분이 다가와 아버지를 끌어안고 그저 목놓아 울었다고 합니다. 실컷 울고 난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셨지만, 아버지는 가슴 한구석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셨다고 합니다.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도 자식을 먼저 보낸 분이었습니다.
다른 사람의 고통은, 같은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.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. 그리고 유다가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주십시오.
유다의 리더십
이제 요셉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. 온 땅에 기근이 들자, 야곱은 베냐민만 남겨 두고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 곡식을 사 오게 합니다.
당시 애굽의 총리는 요셉이었지만,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. 요셉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. 이 만남에서 요셉은 자기에게 친동생 베냐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. 그래서 시험을 하나 준비합니다. 시므온을 옥에 가두고, 베냐민을 데려와야 너희 말이 사실임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.
소식을 들은 야곱은 마음이 무너졌습니다.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. 요셉은 죽었다고 여겼는데, 이제 베냐민마저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니요.
장남 르우벤이 베냐민을 안전하게 데려오겠다고 나섰을 때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. 그런데 유다가 나서자 야곱은 허락합니다. 저는 야곱이 유다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, 자식 둘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 유다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.
그렇게 형제들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. 첫 번째 여행에서 성경은 이들을 ’요셉의 형들’이라고 부릅니다. 그런데 두 번째 여행에서는 ’유다와 그의 형제들’이라고 부릅니다. 눈여겨볼 대목입니다.
애굽에서 유다는 ‘바로와 같은’ 요셉 앞으로 나아갑니다. 그리고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하면 아버지 야곱이 슬픔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.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. 자식 둘을 먼저 보낸 유다는 그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, 온 힘을 다해 간청했을 것입니다. 급기야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자청합니다.
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(창세기 44:33-34)
요셉은 그 오랜 세월 동안 형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. 그래서 형들을 보자마자 알아보았고, 자기에게 한 일이 있는 형들이 베냐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살폈습니다. 그런데 자기를 종으로 팔았던 바로 그 유다가, 이제는 동생의 안전을 위해 눈물로 간청하고 있었습니다. 게다가 자기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합니다. 유다의 이 변화를 본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.
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(창세기 45:2)
유다의 참된 축복
요셉을 그토록 울게 한 것은 유다의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. 유다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.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사용하셔서 유다를 빚어 가셨습니다. 그는 이제 베냐민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고, 그의 희생은 가족을 화해시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.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.
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왕국은 훗날 둘로 나뉘고5, 그중 하나가 유다 왕국입니다. 그런데 이 유다 왕국의 중심에는 지파가 둘 있었습니다.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입니다.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도 그 곁에 있었지만, 왕국의 중심을 이룬 것은 이 두 지파였습니다.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, 사도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6. 저는 이 두 지파가 함께한 것이, 유다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. 다만 유다 지파가 받은 복은 그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,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하신 은혜였습니다. 문제 많은 두 형제의 지파가 끝까지 함께했다는 사실에는 어딘가 시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.
이제 유다의 희생에서 시선을 조금 더 멀리 옮겨 보겠습니다.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,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.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순종했습니다. 그러나 하나님은 늙어서 얻은 아들을 잃는 그 끔찍한 고통을 아브라함에게 겪게 하지 않으셨습니다. 대신 어린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.
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(창세기 22:14)
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끼신 것을 자기 자신에게는 아끼지 않으셨습니다. 이삭이 죽음을 면한 그 모리아 산 일대에서,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습니다.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습니다.
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(로마서 8:32)
제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. 딸이 태어난 뒤 처음 맞은 부활절 예배에서,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와 예배 내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.
다시 유다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. 유다도 자기 삶을 살았습니다. 그러나 그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. 여호와 이레, 곧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.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과,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실제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함께 참이기 때문입니다7.
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(잠언 16:9)
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,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. 저는 그것이 참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.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.